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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1, 2021

코로나19 고통 가혹했기에…2021년 더 절실한 6인의 바람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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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고통 가혹했기에…2021년 더 절실한 6인의 바람 - 한겨레

격리병동 간호사, 코로나19 확진자, 택배기사, 장애아동 부모, 콜센터 상담원, 이주민
2021년 더 절실한 6인의 바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회 구성원들을 무차별로 공격했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가혹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환자를 치료하는 격리병동 간호사에게 지난해는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진 1년이었다. 바이러스는 택배 기사, 정부 콜센터 상담원 등 ‘비대면 시대’에 업무량이 폭증한 노동자들의 어깨도 무겁게 짓눌렀다. 대면 교육이 필수인 지적장애 학생과 그를 보살피는 부모에겐 집은 ‘숨 막히는 감옥’이었다. 평소에도 위태로운 삶을 이어오던 이주노동자는 코로나19로 삶 자체가 뿌리째 흔들렸다. <한겨레>는 지난 12월26~30일, 지난 1년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의 새해 바람을 들었다. 긴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모두 조심스레 ‘터널 밖 세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회복’은 지난해를 견뎌온 모두가 바라는 일이지만 이들에겐 올해 더 간절하다.
코로나19 격리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이아무개(26)씨. 이씨 제공
코로나19 격리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이아무개(26)씨. 이씨 제공
■ 격리병동 간호사 “지금이요. 지금이 제일 힘들어요” “지금이요. 지금이 제일 힘들어요.” 서울의 한 코로나19 격리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이아무개(26)씨는 2020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공공병원에서 4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요즘 심한 피로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연일 코로나19 확진자가 1천명대를 유지하면서 중증 환자가 입원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아예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도 많아 2시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주고, 식사를 돕고 소변줄이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도 늘었다. “육체적 피로만큼이나 심리적 피로도 커요. 최근에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는 환자가 너무 많은데 병상이나 의료진 인력은 부족하다 보니 처치에 한계가 있어요. 전에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환자는 당일에 큰 병원으로 옮겼는데, 요즘은 며칠 기다려야 하기도 해요. 혹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압박감이 정말 심해요.” 한겨울에도 답답하고 더운 방호복은 지난해 3월부터 일상이 됐다. 방호복을 입고 화장실에 갈 수 없어 방호복을 입기 전에는 목이 말라도 참았다가, 벗고 나서야 몰아서 물을 마신다. 혼자 사는 이씨는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올해 가족과 친구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어딘가에 사람이 몰린다거나 몰래 클럽을 운영한다는 뉴스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미운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환자들의 택배 물품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환자당 일주일에 한 번만 택배 반입이 가능하다고 안내했지만 서너번씩 택배가 오고 반입 불가능한 품목을 몰래 보내기도 한다. 그래도 고된 일상에서의 기쁨은 결국 환자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완치된 환자의 퇴원을 배웅할 때가 가장 뿌듯해요. 감사하다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아요.” 이씨에게 코로나19는 ‘사명감’이다. 다만 사명감만으로 계속 버틸 수는 없으니 ‘처우 개선’을 올해 바람으로 꼽았다. “국가적 재난 속에서 저에게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 것 같아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업무량 증가에 외부 파견 간호사와 급여 차이에서 오는 박탈감 때문에 사직하겠다는 동료들도 늘고 있어요. 올해는 기존 병원 간호사들에게도 대우를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지난 6∼7월 코로나19 치료를 받은 박아무개(25)씨. 박씨 제공
지난 6∼7월 코로나19 치료를 받은 박아무개(25)씨. 박씨 제공
■ 확진자 “내게 코로나19는 그림자” 지난해 6월9일 새벽 2시, 잠들지 못하던 박아무개(25)씨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박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그때가 “살면서 가장 무서운 벨소리를 들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보건소에서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음성이면 문자, 양성이면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거든요.” 박씨는 확진 판정을 받기 이틀 전 아르바이트 하던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자가격리 중이었다. 확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억울한 감정도 들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논 적이 없었거든요.” 전화를 받은 그 날부터 박씨는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7월8일까지 꼬박 한 달을 입원했다. 아르바이트로 2년 동안 돈을 모으며 준비한 미국 여행이 코로나19로 무산됐을 때,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발 집단 감염이 발생했을 때도 코로나 감염이 자신의 일이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자취를 하는 박씨는 오전 8시 집 근처에 있는 회사로 출근해 오후 2시까지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은 뒤 밤 10시까지 스터디카페에서 영어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주중 내내 반복했다. “저는 정말 집순이예요. 주말에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어요.” 마스크도 매일 쓰고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밥을 먹으려면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었고, 잠깐씩 고쳐 쓴 순간들도 기억났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확진보다 더한 고통은 따로 있었다. 확진 판정 며칠 전 잠시 스쳤던 동생이 2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경찰시험을 준비하던 동생은 필기에 합격하고 체력시험을 앞둔 터였다. 동생은 시험 준비를 위해 등록한 체력학원에 갈 수 없었다. 방에서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를 해야 했다. 다행히 자격격리가 끝나고 치러진 시험에서 동생은 최종합격했다. “3년간 준비한 시험이 저 때문에 물거품이 될까 봐 마음이 타들어 갔어요.” 박씨는 입원 2주 동안 아끼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죄책감에 내내 울며 보냈다고 한다. 서서히 병원 생활에 적응한 박씨는 그 과정을 가족과 친척들에게 공유하고 싶어 유튜브를 시작했다. 구독자 8명으로 시작한 박씨의 브이로그(유튜브 채널 ‘순지로운 생활’) 첫 편은 조회수 100만을 돌파했다. 이 채널에는 박씨의 병원 생활부터 지난 10월30일 이뤄진 ‘혈장 기증’까지 담겼다. 박씨의 치료도, 동생의 시험도 끝났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완치되면 모든 게 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진자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더라고요. 저는 일상 생활을 했을 뿐인데…” 박씨는 코로나19가 자신에겐 ‘뗄 수 없는 그림자’라고 말했다. ‘2021년에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묻자 박씨는 “2019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웃었다가 잠시 뒤 “돌아가는 것보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돌아가거나 극복하거나 똑같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없겠지만, 극복을 해야 소중한 일상을 알 수 있는 거니까요.”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택배기사 김아무개(59)씨 제공
택배기사 김아무개(59)씨 제공
■ 택배기사 “올해는 저녁이 있는 삶 좀…” “코로나19는 꼭 막걸리 같아요.” 6년 차 택배기사 김아무개(59)씨에게 ‘코로나19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한겨레>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퇴근해 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던 참이었다. 눈앞에 있는 막걸릿잔과 지난 1년이 겹쳐졌다. “짧게 마시면 각성효과만 내고 끝인데 길게 마시면 사람이 인사불성이 되잖아요. 사회도 마찬가지죠. 짧게 지나갔으면 감염병에 대한 교훈이 됐을 텐데 너무 길어지니까 만성이 돼 다들 너무 힘들어진 것 같아요.” 지난해는 그에게 유난히 고된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2019년에 견줘 체감상 30~40%가 늘었다. 물량이 제일 몰리는 날에는 400개 가까운 물량을 처리할 때도 있다. 무릎이 안 좋아진 ㄱ씨는 매일 퇴근 뒤 저녁마다 파스를 바르고 잔다. 가슴 아픈 순간도 많았다. 동료들이 아프고 다쳐도 자기 물량을 처리해야 한다며 병원도 제대로 못 가는 게 김씨는 제일 가슴이 아프다. “여름이지 아마. 40대 중반 정도 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하루는 전날에 택배 나르다 갑자기 힘이 풀리고 어지럼증이 생겨 계단에 한 시간 넘게 주저앉아있었다는 거예요. 병원 오가는 시간 때문에 다들 갈 엄두를 못 내요. 그러다 결국 그만뒀어요.” 코로나19 때문에 깨달은 것도 있다. 주변 사람의 소중함이다.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진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잔 하던 삶의 낙이 사라진 지 오래다. “가까운 사람 만나는 게 너무 소중하더라고요. 역설적으로 주변의 소중함을 더 알게 된 거 같아요.” 그래도 코로나19 덕에 웃을 일도 생겼다고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배달하는 집 현관문 앞, 어린아이가 쓴듯한 삐뚤빼뚤한 글씨의 ‘택배기사 아저씨 힘내세요’라는 메시지와 마주친다. 쪽지와 함께 비타민 음료나 초코파이, 귤도 놓여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감사하죠. 기분이 너무 좋고 하루종일 생각이 나요. 택배 기사 고생하는 걸 알아주는 거 같아 감사해요.” 올해 그가 바라는 건 두 가지다. ‘코로나19의 종식’과 ‘저녁이 있는 삶.’ “지난해 건당 수수료가 오히려 깎였어요. 수수료를 조금만 높이고 택배기사를 더 투입하면, 한 사람당 담당하는 물량이 줄어도 받는 돈은 비슷할 거 아니에요. 우리도 저녁에 퇴근해서 가족과 저녁 먹고 싶어요. 쉬는 날도 늘어나 가족과 휴가 때 여행도 가고 싶고요. 코로나19가 종식돼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박아무개(53)씨 제공
박아무개(53)씨 제공
■ 지적장애 학생과 가족 “일주일에 한두번이라도 복지관 열었으면…” “외출을 제대로 못 하니 아이는 1년 내내 집에 갇힌 셈이죠. 장애아이와 가족 모두에게 암담한 한해였어요.”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박아무개(53)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숨을 쉬었다. 박씨의 첫째 딸 수민(가명·15)양은 인천의 한 중학교 특수학급에 재학 중이다. 박씨는 “장애 학생들은 대면 교육이 필수인데 등교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사실상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한 해였다”고 말했다. 박씨에게 코로나19는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었다. 금방 종식될 것 같았던 전염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산 세가 커졌다. 그때마다 거리두기 단계는 높아졌고 등교 인원도 쪼그라들었다. 원격수업은 수민이에게 버거웠다. 지난 4월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개학을 했을 땐 박씨가 수민이 대신 교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부모 개학’이었다. 박씨는 “교사에게 온라인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자 교사는 출석 체크만 하라고 했다. 그 뒤로 학교에서 제공한 마땅한 교육은 없었다”고 말했다. 수민이에게 교육의 부재는 곧 ‘퇴행’이다. 지난해 수민이가 학교에서 대면 교육을 받은 기간은 두 달밖에 되지 않는다. 방과후수업을 듣던 복지관도 문을 닫았다. 박씨는 “장애아이들은 외부활동을 통해 지속적인 교류를 해야 ‘현상유지’라도 되는데 그조차도 힘든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외부활동이 줄어들자 수민이는 스스로 머리를 때리는 등 돌발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늘었다. 박씨는 “스트레스 해소가 안 된 상황에서 언어로 불만을 말하지 못하니 행동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아져 답답하고 걱정된다”며 “주변에 코로나19 이후 장애아이를 돌보다 우울증까지 온 부모도 더러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의 올해 바람은 소박하다. “제발 장애인복지관이 완전히 폐쇄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좋습니다. 그게 아이와 제가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길이니까요.” 강재구 기자 j9@hani.co.kr
정부민원안내 콜센터(110 콜센터) 상담사 석아무개(41)씨 제공
정부민원안내 콜센터(110 콜센터) 상담사 석아무개(41)씨 제공
■ 정부 민원 콜센터 상담원 “저희를 업무 파트너로 대해주세요” “국무총리 이름이 세균이어서 코로나가 이렇게 퍼진 것 아니냐, 이 사태를 누가 책임질 거냐.” 정부민원안내 콜센터(110 콜센터) 상담사 석아무개(41)씨는 지난해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해 생기는 우울증)와 울분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본인 말이 끝나지 않으면 공중전화를 바꿔가면서 계속 전화를 거시는 분이었어요. 코로나로 실직하고 집에만 있다는 말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고 짐작돼 얘기를 다 할 때까지 기다렸네요.” 4년 차 상담사인 석씨는 지난해 ‘감정노동자’로서 유독 힘든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화할수록 정부는 각종 지원금 정책을 내놨고, 이와 관련한 전 국민의 각종 문의가 110 콜센터로 쏟아졌다. “하루평균 통화시간이 3시간에서 3시간30분을 넘기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3월부터 9월까지 하루평균 5∼6시간을 통화한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어요. 점심시간과 화장실 이용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전화기에 매달려있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가는 상담사들도 많았어요.” 업무용 피시(PC) 모니터 왼쪽 상단에 있는 ‘대기고객’ 숫자도 심씨를 포함해 모든 상담사의 가슴을 짓눌렀다. 석씨는 “상담사들은 전달받은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재난지원금이 지급된다는 뉴스 한 줄만 떠도 전화가 폭주했어요. 긴급고용안정지원금 안내까지 떠맡았던 7월 중에는 (대기고객 수가) 최대 900명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코퍼레이션 소속인 석씨는 올해 1월1일부터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침에 따라 ‘원청’인 권익위원회의 공무직으로 신분이 바뀐다. 하지만, 동료 중 일부는 면접을 거쳐야 하기에 석씨의 새해 바람은 ‘직장 동료들의 공무직 전환’이다. “채용 대상자 48명이 무탈하게 전부 (공무직으로) 전환됐으면 좋겠어요. 또 공무원분들도 이제는 저희는 하청 직원이 아닌 업무 파트너로 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과도한 업무량 또한 새해 들어 개선돼야 할 과제다. “곧 3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될 텐데 벌써 문의 전화가 많아요. 전 국민을 상대로 다시 안내를 시작해야 합니다.” 석씨에게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는 업무’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위원장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위원장
■ 이주노동자 “저희 바이러스 전파자 아니에요” “이주민이 한국사회에서 기본권을 보장받으면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위원장은 코로나19를 겪었던 2020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통감했던 1년이었다고 털어놨다. 우다야 위원장은 “코로나19 유행 이전부터 한국에서 계속 일하면서 함께 살았는데 우리를 잠재적 바이러스 전파자로 보는 시선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며 “이주민 대부분이 긴급재난지원금은 꿈도 꾸지 못했고, 일부 이주민은 마스크조차 구하지 못해 건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한국정부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건강을 위협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나 이주민에게는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는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안 됐거나 미등록 체류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이주민들이 마스크를 구하지 못했던 때를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다. 이주노조와 일부 시민단체가 자구책으로 마스크를 모아 지원하기도 했지만 충분치 못했다. 우다야 위원장이 “코로나19는 나에게 건간(건강)을 위헙(위협)하는 적”이라고 한 이유다. 코로나19로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지만 이주민은 한국인보다 더 쉽게 해고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7∼8월 서울·경기 및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민 3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응답자의 65.7%가 ‘소득 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가장 힘들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28.5%가 코로나19로 임금체불과 임금삭감을 경험했다고 밝혔고 15%는 해고됐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주민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긴급재난지원금이나 실업급여 등의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며 이들이 거주할 곳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일자리를 잃었지만 비행길이 끊겨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주민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일시적으로 체류기간을 늘려주긴 했어요. 하지만 노동할 수 있는 허가는 내주지 않아 머물 곳이 없는 이주민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주노조는 거주 불안정 이주민이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해 12월20일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이주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우다야 위원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어떻게 선진국으로 가고 있다는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나요. 이주노동자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일하는 기계로 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의 바람은 지난해와 다름 없다. “2021년엔 이주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가 꼭 폐지돼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재호 기자 ph@hani.co.kr


2021-01-01 11:21:37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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