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터 실천하면서 사회구조도 바꾸자는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가 조금씩 나아집니다.” 정년보다 6년이나 일찍 명예퇴직한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거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상과 그림을 펼쳐놓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을 ‘나부터’ 타박타박 걸어가는 실천가는 그리 많지 않다.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는 일상의 삶이 자신의 말과 다르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보다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꿈꾸고 역설해왔으며, 사람을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평가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말에 그치지 않고, 그는 마을 이장을 맡아 동네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문학교실을 열어 이웃들과 함께 삶을 성찰하고 있다. 또 자녀 셋을 모두 시골 대안학교에 보내는 등 ‘유기농 교육’을 했으며, 집에서는 생태화장실과 텃밭 농사로 생태순환적 생활을 하고 있다. 혁명적 삶이다. 그는 지난 2월 정년보다 6년이나 일찍 교수를 관뒀다.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고려대 세종캠퍼스와 자택 등에서 강 전 교수를 만나 사회변화에 대한 전망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인터뷰 요청에 “나에 대한 포장이 될 것 같아서 인터뷰를 가능한 한 안 하고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왜 교수직을 일찍 관뒀는지에 대해 ‘마을 이장 교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은 하는 게 도리 아니겠느냐”고 설득한 끝에야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강수돌(59) 전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이하 호칭 생략)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이장을 관둔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긴 바짓단을 접어서 손바느질로 꿰맨 흔적이 뚜렷한 헐렁한 바지처럼 생각의 품은 넓었으며, 마음은 따뜻했다.
―지난 2월 퇴직한 뒤 어떻게 지내요?
“전보다 주경야독을 하기가 편해요. 낮에는 텃밭을 돌보거나 사람을 만나고, 저녁엔 글을 읽거나 쓰죠. 시민강좌 같은 것도 시간 나는 대로 하고요.”
―교수 정년이 아직 6년 반이나 남았는데, 왜 그만뒀어요?
“오래전부터 정년을 5년 남기고 관두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수로서의 생활 자체가 특권인데다가 다른 직종의 평균적인 정년(60살)보다 더 하는 게 조금 죄스럽게 느껴졌어요. 또, 대학 사회가 비즈니스화되면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데 거기에 맞추는 것도 좀 힘들었고요.”
―비즈니스화라면요?
“행정업무나 교과 과정, 심지어 학생과의 관계도 비즈니스처럼 됐어요. 취업을 어떻게 하느냐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장기 결석한 학생들에게 전화해서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야 하는 일종의 감정노동까지 하도록 요구받거든요. 그런 결과가 모두 대학교 평가지표에 반영되고, 그건 결국 교육부의 예산 지원과 직결되고요. 갈수록 교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비즈니스맨화되는 분위기들이 저랑 안 맞았어요.”
―온라인 수업도 결심을 앞당긴 요인이었던가 봐요. 최근 <교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교수의 눈물은 온라인으론 전달되지 않는다”고 표현했더군요.
“지난해 온라인 강의를 두 학기 해보니까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깊은 통증이 느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다루면 아픈 이야기들이 많은데 대면수업에서는 학생들과 슬라이드를 같이 보면서 울고 그러거든요. 또 학생들이 발표하다가 실수해서 웃기도 하고요.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게 교육인데 온라인으로 하면 그냥 글자만 보면서 진도 나가기 바쁘고, 이상하게 에너지가 빨리 소진되는 것 같았어요. 이러다가는 쓰러지겠다 싶어, 살아서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지난해 가을 피로 누적으로 인한 ‘번아웃’ 진단을 받았다.
―그 정도로 힘들었군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결과이기는 한데 그동안 너무 많이 설치고 다녔죠. 하하.”
“내가 원하는 사회가 있다면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책임성 있지 않겠어요?”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신안리의 한 음식점 마당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은 서울대 경영대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1994년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일하다가 1997년 고려대 서창캠퍼스(현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가 됐다. 그는 교수뿐 아니라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2005~2010년), 세종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역임, 현 세종시 난개발방지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공동체 활동에도 열심이다. 또 시민을 위한 교양도서 작업도 활발히 하고 있다. 최근에 펴낸 <강자 동일시>를 비롯해 그동안 단독으로 쓴 책만 40권에 육박한다.
―대학이 많이 변했다고 했는데, 학생들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최근 세종캠퍼스 학생 한명이 고려대 총학생회 간부가 됐다가 안암캠퍼스 학생들이 세종캠퍼스는 같은 학교가 아니라고 반발해서 물러난 일이 있었잖아요. 학생들이 명백한 차별행위를 해서 놀랐어요.
“저도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차별은 사실 모든 대학에서 있어왔죠. 농어촌전형으로 간 학생과 정시전형으로 간 학생, 또 수시와 정시로 입학한 아이들 사이에 서로 구별짓기를 하는 일들 말이죠. 이런 차별의식의 뿌리는 요즘 아이들이 사회나 어른, 부모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늘 차별화된 평가를 받아온 데 있어요.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자본이 노동력을 차별화해서 A급 노동력과 B급 노동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서울 학생들은 세종 학생들을 소위 2등급 취급하는 거죠. 유명 대학을 일컫는 스카이(S·K·Y)라는 개념도 나머지 대학은 2, 3등급으로 본다는 이야기이고요.”
자본주의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강수돌의 학문적 관심은 박사 논문(‘한·독 자동차산업의 경영 합리화와 노사관계 변동’)에서 알 수 있듯 경영자보다는 노동자, 돈벌이보다는 공동체살이에 가 있다. 그동안 쓴 책들도 <노동을 보는 눈> <살림의 경제학> <나부터 교육혁명> <팔꿈치 사회> <경쟁공화국> 등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 찾기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경영학자인데도 주식이나 펀드 등 이른바 투자는 한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요. 하하.
“유일하게 주식을 한번 산 적이 있긴 해요. 아주 오래전인데 연말 소득공제를 할 때 어떤 주식을 사면 그것만큼 공제해준다는 권유를 받고 신청해서 연말에 공제혜택을 받았어요. 그런데 주식을 살 줄 몰라서 안 샀더라고요. 하하. 도로 물어내고 다음해에 샀다가 곧 정리를 하고 끝냈죠. 투자라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자본의 일부가 되는 거여서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다른 경영학자들과 달리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와 삶을 고민해왔는데 언제부터 그랬어요?
“1981년에 대학에 가서 공부해보니까 이것은 돈벌이 경영이지 살림살이나 사람을 위한 경영이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이게 아니라는 고민을 했고, 졸업할 무렵에는 이런 문제의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 후 제 나름으로 만든 개념이 ‘살림살이 경영’이에요. 가정생활 등 삶에 대한 경영과 사회 경영, 세상 경영이 다 포함되는 개념이죠. 세상을 잘 경영해서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제의 본래 의미와도 뜻이 같고요”
―돈벌이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은 보이던가요?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간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인간과 같이 가려면 선한 자본이 성공해야 하는데 지금 보면 선한 자본은 다 망하잖아요.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빠진 거죠. 군주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왔듯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자본주의도 영원할 수는 없죠. 이미 자본주의를 넘어갈 맹아들이 많아요. 충남 태안의 한 어촌마을이나 경기도 포천의 산촌마을에서 노인들에게 마을 기본소득이나 마을 연금을 주는 사례 등이 그런 싹이죠. 자기들도 나이 들어 노인이 되면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있죠. 이런 것은 비자본주의적이자 가족의 원리예요. 우애와 연대, 책임감으로 운영되는 가족의 경험이 확대되면 그게 좋은 사회가 되는 거죠.”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신안리 자택 마루에서 부인, 막내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무로 모서리를 맞추고 황토로 벽을 메운 친환경적인 귀틀집을 1999년에 지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주변인이 되어도 좋다가 아니라 주변인이어서 좋아요. 그냥 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이죠.”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처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도 많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강수돌이 구분되는 지점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이나 추구하는 사상을 말로만 하지 않고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을 팔꿈치로 밀어내는 ‘팔꿈치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산다. 자녀 교육은 대표적이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로, 강남으로 갈 때 그는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고, 아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는 참교육을 했다. 그의 책 제목대로 ‘나부터 교육혁명’이었다.
―젊었을 때 민주화운동 등 좋은 세상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도 대부분 자녀교육 앞에서는 일반인들과 똑같거나 심지어는 더 심한 교육경쟁에 나서는데 교수님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 오히려 농촌으로 갔죠?
“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큰애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러 가는데 마치 송아지를 몰고 도살장을 향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학창시절에 겪었던 경쟁교육을 또다시 아이들이 반복하겠구나 싶어서요. 어떻게 하든 그런 교육을 받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집사람과 다짐했어요. 아이의 통지표나 성적표에 연연해하지 말자, 아이가 친구 잘 사귀면서 심신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보살피자, 자기 꿈을 가지게 되면 그 꿈을 밀어주자고 말이죠. 마침 1997년 고려대 안암(서울)과 서창(세종) 양쪽에서 교수 모집이 있었는데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서창캠퍼스를 택했죠. 당시 과천에 살았는데 아이 셋을 데리고 기쁘게 이사했어요.”
―여기 와서도 아이들을 멀리 산청과 제천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냈잖아요. 둘째와 셋째가 간 학교는 학력 인정도 안 되는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또래 간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걱정은 없었어요?
“그런 고민은 없었어요. 큰애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진학해서 무난하게 생활했죠. 수학 선생님이 ‘얘는 영재교육을 좀 시켜야 되겠다’고 전화를 해올 정도였어요. 사실 영재는 아닌데요. 하하. 학교 차원에서는 밀어주고 싶은 아이에 속했나 봐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마음은 고맙지만, 제발 우리 애는 그냥 놔두세요’라고 했어요. 다른 부모들은 우리 애 좀 영재반에 넣어달라고 하는데 저는 제발 놔두라고 했으니 선생님이 쇼크 받았나 봐요. 그 소문이 이 동네에 퍼지면서 약간 전설이 되기도 했었죠. 하하.”
―학교에서 아이 공부를 더 시켜주겠다는데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택한 거네요.
“아이 선택이었어요. 중2 때였는데 아이가 어느 날 자기에게도 꿈이 생겼대요. 뭐냐고 물었더니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꿈치고는 독특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늦게 온다고 두드려 패지 않고 머리 길다고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지 않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꿈이라기보다는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고등학교는 그것보다 더할 텐데 아이 가슴에 멍이 너무 많이 들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이한테 아빠가 후원하는 작은 대안학교가 있는데 거기 캠프 한번 가볼래라고 제안했죠. 아이가 다녀오더니 ‘꼭 그 학교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였어요. 아래 둘은 큰애 학교행사 때 가끔 가보고는 자기들은 중학교 때부터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중학교 과정이 있는 제천 간디학교에 가서 고교 과정까지 마쳤어요. 중·고 과정은 나중에 모두 검정고시를 봤죠.”
―대안학교도 종류가 많은데 교수님 자녀들이 다닌 학교는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곳을 나오면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인 대학 졸업장을 쥐기가 힘들 수 있는데 그런 걱정도 안 했어요?
“제가 자본주의를 너무 빨리 알아버렸나 봐요. 하하. 저는 일종의 고급 노동력으로 살아가지만 노동력으로 규정되는 삶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잖아요. 하하. 제가 독일까지 가서 공부하고 온 결론은 ‘노동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박사공부 하면서 이 한 줄의 진리를 얻었죠.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아무래도 많이 배우고 또 이름있는 대학 출신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진짜 중요한 거는 내면의 행복이죠. 자기 내면의 행복이 중요하지 남들이 보는 시선이 적어도 1차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런 생각에서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학교나 진로를 선택해왔으니 후회나 걱정할 일도 없죠. 애들도 그렇게 키워줘서 다 고맙다고 해요. 특히 큰애는 졸업할 때 ‘대안학교에 갈 수 있게 해줘 너무나 고맙다’면서 눈물까지 흘렸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고요.”
수년 전에 둘째인 딸이 그린 강수돌 가족의 설거지 담당표. 강수돌 제공
“내가 원하는 사회가 있다면
사회구조 탓 앞서 실천이 중요
나부터 행하는 사람 많아져서
함께 힘 합하면 세상 변화 올 것”
“인생에선 내면 행복이 핵심
일류대학·직장 등 중심 말고
각자 꿈 찾는 일류인생 추구를
변방 향한 삶이 훨씬 더 풍부”
큰아이는 고교 졸업할 때쯤 재즈 피아노를 하겠다고 말했다. 졸업 뒤 서울의 음악학원 및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 버클리 음대 교수들이 각국을 돌면서 실시하는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장학금 일부를 제안받고는 뒤늦게 대학에 가서 대학원까지 마쳤다. 지금은 청소년, 성인 등에게 재즈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독립해 산다. 딸인 둘째는 대안학교 졸업 뒤 혼자 캐나다로 건너가 전문대에서 2년 동안 제과제빵 공부를 해 토론토의 제빵회사에 취직했다. 셋째는 고교 졸업 뒤 1년 동안 유기농업을 배우고는 군복무 뒤 스포츠 물리치료사로 방향을 바꿨다. 전문대를 거쳐 건양대에서 물리치료를 공부하고 있다. 인터뷰 때 집에서 만난 셋째는 “지금 배우는 게 재밌고 행복하다”며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일류 대학이 아니라 일류 인생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평소 철학대로 아이들을 키운 것 같군요.
“네, 일류 대학이나 일류 직장이라는 개념은 정말 문제가 많아요. 그런 것은 100명 중에서 많이 잡더라도 10명에게만 해당되거든요.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뭐가 되죠? 이류, 삼류라는 거잖아요. 이건 답이 아니죠. 일류 학생과 이류 학생으로 나누어지는 컨베이어 라인을 탈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의 다양한 끼를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그러면 실력자가 되더라도 권력이나 돈에 중독되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이 돼요. 각자의 꿈을 실현하면서 사회에도 유익하게 사는 게 일류 인생이죠. 그런 인생에는 인원 제한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초지일관할 수 있었어요?
“1989년 어려운 시절에 독일로 유학 가면서 나름의 결심을 했어요. 나를 일부러 내세울 필요는 없겠지만, 언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게 살자고 말입니다. 자본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 민중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서 학문을 하자고 결심했죠. 그런 초심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경계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죠. 생각 없이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자칫 ‘한때는 괜찮았던 사람’으로 전락하기 쉽거든요.”
강수돌은 경남 마산이 고향이다. 막노동꾼인 아버지는 마산의 신월동 등 산동네 판잣집에서 아들 셋 등 다섯 식구를 겨우 건사했을 정도로 평생 가난했다. 늦둥이가 탈 없이 쇠처럼 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쇠돌이’라 불렀는데 호적 신고할 때 동사무소 직원이 한자가 없는 쇠 대신에 수(守)자로 바꿨다. 나라가 지어준 이름을 가진 강수돌(姜守乭)은 공부를 잘해 장학금으로 중·고교와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전형적인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2월 퇴직하면서 “지난 25년 가까이 교육과 연구, 봉사라는 교수의 3대 직분을 나름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대학교라는 울타리 덕분이었다”며 퇴직금의 절반이 넘는 2억원을 학교에 기부했다.
―대학교수 강수돌보다는 마을 이장 강수돌이 더 유명해요. 하하.
“저도 처음에는 비교적 조용히 살려고 주민들이 사는 곳보다 훨씬 안쪽에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마을에 송전탑 문제가 불거졌어요. 고려대 뒷산과 제가 사는 마을 복판을 고압선이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 싸움을 하면서 주민들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생명과 환경을 중시하는 학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요. 주민설명회 때 송전탑 싸움을 위한 국내외 자료들을 구해 들고 가서 내놓았죠. 결국 한전에서 두 손 들고 지중 매설로 갔어요. 그때부터 진짜 마을 주민이 됐죠. 그리고 몇년 지나서 이번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거예요.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땅인데 당시 이장과 몇몇 투기세력, 행정권력이 한통속이 돼 서류를 조작해서 땅의 용도를 바꾼 거죠. 그것을 파헤치고 마을 지키기에 나서다 보니까 이장에 추대됐고, 연임까지 했어요. 제가 공부도 해야 하고 다른 역할들이 있으니까 마음만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만나서 막걸리 한잔 나눌 때는 사람 사는 맛을 알 것 같더라고요.” 인터뷰 때도 동네의 한 식당에서 만난 인근 주민들은 그를 금방 알아봤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는 20여년 동안 텃밭농사를 지은 농부이자 생태순환적 삶을 살아온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1999년에 지은 그의 집은 전통적이면서도 친환경적인 귀틀집이다. 나무로 네 모서리의 틀(귀틀)을 맞춘 뒤 나무 사이 공간은 황토흙으로 채운 집이다. 갈라진 틈새 등을 보수하기 위해 몇년 전 대대적인 수리를 하면서 창과 출입문을 단열이 잘되는 것으로 바꿨지만, 기본 틀과 재료는 처음 그대로다. 대신 집수리하면서 집 안의 수세식 화장실을 아예 생태 화장실로 바꿨다. 소변은 별도의 통으로 흘러들고, 대변은 톱밥이나 왕겨 등으로 덮어서 처리하는 방식이다. 각각 별도로 발효시킨 대소변은 집 앞 텃밭의 거름으로 쓰인다. 그 전에는 집 밖에만 생태화장실이 있었고, 이곳은 주로 강수돌이 이용했었다. 부인은 “처음에는 약간 불편했지만, 지금은 화장실 물을 안 내리니까 환경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서 좋다”고 말했다.
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를 정화하고자 만든 연못을 살피고 있는 강수돌 전 교수.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 전 교수 집의 생태화장실. 변기 안에는 소변과 대변을 따로 받는 통이 있으며, 대변은 톱밥이나 왕겨 등으로 덮는데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세종/김종철 선임기자
―전공도 아닌데 생태와 환경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우선은 제 전공과 직결됩니다. 하하. 자본주의는 생산성에 치중하잖아요. 투입 비용을 줄이는 대신에 산출을 늘리는 경쟁을 하죠. 그런 경쟁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오염된 것을 정화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죠. 또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돌리거나 사람을 마구 잘라내고요. 이런 것은 다 자연이나 인간 생명력을 좀먹는 것이고, 결국 생산성이 아니라 ‘파괴성’으로 치닫는 거죠. 그런 문제의식이 있다면 생명력과 생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둘째는 독일 생활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제 지도교수가 학교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에 살았는데 논문을 상의하러 가끔 찾아가서 보면 완전히 농부로 살더군요. 양을 키우면서 사료 대신에 건초를 먹이고, 사과나무 등에는 농약이나 제초제,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더라고요. 핵 발전을 반대하고 사회연대 운동도 하면서 실제 삶을 자신의 철학대로 사는 것을 보면서 감동했죠.” 강수돌은 지도교수인 홀거 하이데와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중독의 시대> 등을 공동으로 쓰는 등 지금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한 사람이 끼치는 선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꼈어요.
“이론과 실천이 하나로 수렴되도록 살아보려고 나름으론 노력하는데 그다지 훌륭한 것은 못 돼요. 저는 차도 사용하죠. 또, 전기도 가능하면 안 쓰거나 덜 써야 되는데 그러질 못하는 등 여러 면에서 철저하지 못하거든요. 늘 마음 한구석에서 자책하고 있죠. 그레타 툰베리가 절박하게 호소하듯 지구에 불이 났는데 정치인이나 기업가, 교수, 언론인들이 다 너무 쾌적하게 살고 있어서 문제예요.”
―그러게요. 작은 것부터 각자가 실천하는 게 중요한데 말이죠.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분명히 세상이 변해야 나도 살기가 편한 게 맞지만, 남의 탓을 하거나 사회구조 탓만 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태도라고 봐요. 내가 원하는 사회가 있다면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책임성 있지 않겠어요? 다른 말로 하면, 나 속에서 세상을 실현하고 싶다는 개념이죠. 내가 살면서 나를 확장한 모습이 세상이 되도록 하면 내가 원하는 삶이 곧 사회에 구현되는 셈이죠. 그래서 ‘나부터’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생각이죠. 그리고 사회구조나 지도자들의 잘못을 손가락질할 때 ‘나부터’ 잘하고 있어야 힘이 있잖아요. 내가 안 하면서 지적질을 하면 그 손가락에 힘이 안 생기죠.”
―그러나 나만 실천하고 사회구조를 못 바꾸면 반쪽짜리 성공도 안 되는 게 아닐까요?
“당연히 개인의 행위와 사회구조 변화가 선순환을 이뤄야죠. 나부터 실천하면서 사회구조도 바꾸자는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가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공간이 열려서 개인이 실천할 새로운 여지가 더 생기게 되지 않겠어요? 저는 그런 개인적 실천이 어떤 몸부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빡빡한 출근길 지하철에서 각자 개인이 옆사람을 배려하면서 자기 공간을 만들 때 콩나물시루 같은 곳이 그래도 견딜 만한 곳이 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차량 증편 등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할 겁니다. 그처럼 각 개인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나 상황을 스스로 확보하고 실천해가면서도 사회 전체의 바람직한 것을 상상하고 함께 만들어가야죠.”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는 귀틀집 앞에 있는 텃밭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지난달 27일 오후 텃밭 언덕에 자라는 참나물을 포기나눔을 위해 캐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앞으로 계획은 있나요?
“일단 쉬려고 하는데 그냥 푹 쉬게는 안 되더라고요. 이런저런 강의 요청이 많아요. 근데 사실 저는 학교 강의보다 시민을 상대로 하는 외부 강의가 편해요. 학교에서는 학생평가를 해야 하잖아요. 지난 25년 동안 제일 고통스러웠던 게 기말 평가를 할 때였어요. A, B, C로 등급을 나눠서 평가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거거든요. 그런 평가는 학생들을 소위 인적자원으로 분류하는 것이고, 그들을 어떤 틀 속에 가두는 것이죠. 평가가 없는 공부가 진짜 공부인데 이는 학교 바깥에서 오히려 이뤄지죠. 그런 일을 하면서 심신을 천천히 추스르려고 해요. 그다음의 계획은 아직 없어요. 여기서 계속 살지 아니면 삶의 공간을 이동할지 고민 중인데 장기적으로는 고향 근처로 가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지금과 비슷하게 살 겁니다. 주경야독하면서.”
―움직이더라도 지금보다 더 주변으로 가겠군요? 하하.
“그렇죠. 서울 내지 중심을 향하는 삶은 그 속에서 또 고지를 점령하려 하는데 그런 고지는 1%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내지 기득권이죠.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변방을 향하고 주변을 향하는 삶이 자기 개성과 색깔을 잘 드러내게 되죠. 고 신영복 선생도 얘기했듯이 중심을 향하면 모두가 획일화되잖아요. 반대로 방향을 바꿔 주변을 향해 보세요. 그러면 각자 자기만의 삶이 열리고, 아까 얘기한 일류 인생을 누구나 살 수 있죠.”
―비주류, 소수자의 삶을 오히려 즐기기인가요?
“자기 삶을 즐기는 건 맞는데 스스로 소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주변인이 되어도 좋다가 아니라 주변이어서 좋고, 중심이 아니어서 좋다는 거죠. 그냥 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이죠.”
그는 인터뷰가 끝날 즈음 “포장되지 않게 좀 깎아내리면서 써달라”고 다시 당부했다. 그 말이 귀에 남아 가급적 사실만 전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이번에도 ‘과대 포장됐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자본주의적인 그의 삶 자체가 남다른 걸.
세종/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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