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년 사이 쿡방(요리방송)이 인기를 끌면서 예능 프로그램의 전면에 등장한 이들이 있다. 요리 실력에 방송 감각까지 갖춘 스타 셰프들이다. 방송에서 인기를 끈 셰프들에겐 팬들이 생겨났고, 식당 역시 유명세를 치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다. 식당 주방에 남성이 더 많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선 어쩌면 이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에서 정지선 셰프(37)는 존재 자체가 귀하다. 여성 비율이 낮기로 유명한 중식계에서 자신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그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지난달 3일 서울 서촌에 있는 중식당 티엔미미(甛密密)에서 정 셰프를 만났다.
■18년간 중식당에서 함께 일한 여성 요리사는 몇 명?
올해로 중식 경력 18년 차인 정 셰프에게도 어설픈 초년 시절이 있었다. 일단 주방에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일할 자리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10곳의 식당에 이력서를 내면 10곳 다 안 받아줬어요. 이력서가 아무리 화려해도 안됐죠.” 정 셰프는 대학에서 조리학과를 전공한 뒤 중국에서 요리 유학까지 마쳤지만 여전히 취업은 ‘높은 산’이었다. 그는 “면접을 볼 때마다 ‘여자가 뭐 할 줄 아냐’ ‘얼마나 일할 거냐’는 얘기를 매번 들어야 해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어렵게 들어간 한 호텔 중식당에서의 생활도 쉽지 않았다. 매일 18~20㎏ 무게의 식자재 캔을 나르고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20㎏짜리 면을 반죽하고 기계로 뽑는 일을 하며 몸도 고됐지만, 정작 그를 버틸 수 없게 만든 건 편견이었다. “주방에 같은 학교 남자 선배가 있었는데 ‘어차피 그만둘 건데 뭐 하러 아등바등 일 하냐’ ‘결혼하면 그만둘 건데 그냥 빨리 그만둬라’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버티고 싶었지만 그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몇개월 만에 식당을 그만 뒀다. 취업하기도 힘들었지만 버티는 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정 셰프는 말했다.
정 셰프는 중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여성은 ‘혼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쉬는 시간이면 남자 동료들이 우르르 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고 퇴근하며 다 같이 술도 자주 마시러 가는데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가 없었어요. 담배를 배워야 하나 싶어 담배를 사보기도 하고 담배 피우는 곳에 따라가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웃음)” 18년간 중식당에서 함께 일한 여성 요리사는 한 명뿐이었다. 그가 아는 여성 중식 셰프는 10명 정도 되는데, 현재 활동을 이어가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정 셰프도 ‘임신’ 이후 일을 잠시 쉬기도 했다. 그가 원했던 건 아니었다. 임신했다는 소식을 식당에 전하자 ‘육아휴직 후 회사에 돌아오면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통보를 들었다. “주방에 아이 낳고 일하는 선배들이 없었어요. 한식이나 양식 등 다른 파트에서도 나이가 많거나 미혼인 여성 요리사가 대부분이었죠. 아쉬웠지만 남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만두고 나왔어요.”
그렇지만 그는 요리사 일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주방에만 있으면 그런 기분이 싹 사라져요. 손님들의 피드백도 저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요.” 정 셰프의 요리를 향한 꿈은 사고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요리사 초년 시절 호텔 중식당에서 일할 때 출근하고 3일 만에 손가락이 기계에 들어가 절단되는 사고를 겪었다고 했다. “잘해보겠다는 마음에 너무 긴장을 했던 거 같아요. 응급실에서 30바늘을 꿰맸는데도 ‘여자는 안돼’라는 얘기가 나올까 봐 아프다는 말도 안했어요. 병원에서 3개월을 쉬라고 했지만 두 달만에 출근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죠. 그만큼 제 일이 좋았고 또 일자리가 절실했어요.”
■중식 셰프가 목표라면 즐겁게 버텨라
보수적인 요리계에서도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정 셰프는 “지난해 강의를 하려고 강원랜드에 갔는데 임산부 조리복이 있더라”며 “주방 문화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 셰프에겐 여성 요리사 지망생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중식 요리사가 되는 방법이 뭔가요?’ ‘저도 요리할 수 있을까요?’ 남성 비율이 높은 주방에서 여성 셰프로 제대로 인정받고 살아남기 위한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그의 대답은 밋밋하지만 정직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지요. 저도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주방에서 비슷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어도 남성 동료들에게 밀리는 거예요. 이들 사이에서 튀려면 학력도 경험도 더 풍부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에 진학했고 중국 유학까지 다녀왔어요.” 정 셰프는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대학에 편입해 3년 정도 요리를 공부했다. 처음 보는 살아있는 식재료들을 접했고 다양한 양념을 익히고 요리에 적용해 보는 경험도 했다. “모든 게 신세계였어요. 그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어요.” 더 부지런히 연습하고 공부하는 것 이외엔 정도가 없다는 걸 그는 몸소 체험했다.
정 셰프는 중식을 목표로 준비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즐겁게 버텼으면 좋겠다. 체력도 길러야 한다. 식품 개발이나 교육자로 가기 위해서도 현장 경험은 필수”라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에게 ‘일할 곳 없으면 우리 식당에 와서 일해’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선배이기도 하다.
‘셰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최근 식당을 연 그 역시도 여느 소상공인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여파로 운영에 대한 걱정이 크다. 하지만 ‘버티기’에 들어가기로 하고 심호흡을 해 본다고 했다. 그가 레스토랑 오너셰프로 이 시기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여성 후배들에게는 큰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October 30, 2020 at 04: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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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당 주방에서 편견 깨기 18년, 여자 후배들 버팀목 된 정지선 셰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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