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이 지났지만 김성재 변사사건은 여전히 대중과 법원 사이의 괴리가 가장 심한 판결 중 하나다. 사진은 솔로 데뷔 음반에 실린 안성진 작가의 김성재 화보. 유족 제공
▶연재 순서
① 운명의 밤
② 오른팔의 주사자국
③ 누가 부검을 반대했나
④ 진정서와 동물마취제
⑤ 제보자와 황산마그네슘
⑥ 누락된 증거와 첫 공판
⑦ 법의학 vs 법의학
⑧ 교체된 검사와 변호사
⑨ 무너진 유죄의 근거들
▶등장인물
K 김성재 여자친구·피고인
서정우 항소심 변호사
이○○ 항소심 검사
안성회 항소심 재판장
김성재 살해사건의 항소심 첫 공판은 1996년 7월18일 목요일 오전 10시, 서울고법 404호 법정에서 열렸다. 심리는 형사5부(재판장 안성회, 주심 하광룡, 배석 최강섭)가 맡았다. 검사 이○○과 변호인 서정우, 천상현, 그리고 피고인 K가 법정에 섰다. 1심 첫 공판 때와는 달리 기자들은 많지 않았다.
인정심문을 마친 뒤 검사 이○○이 K에게 김성재가 평소 콘텍트렌즈를 착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망 당시 성재는 콘텍트렌즈를 착용한 상태였다. K는 성재는 공연할 때는 렌즈를 사용하고 집에선 안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1심처럼 항소심 첫 공판도 일찍 끝났다. 재판장이 심리를 마무리했다.
2차 공판은 8월1일, 같은 법정에서 열렸다. 졸레틸50에 대한 치사량을 두고 검사와 변호사가 1심 때와 같은 주장을 반복했지만, 별다른 공방 없이 2차 공판도 끝이 났다.
8월20일, 3차 공판이 열렸다. 이날 공판엔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수의사도 검찰 쪽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당초 검찰 조사에서 빠르게 마취가 이뤄지는 탓에 졸레틸50의 마약대용 가능성을 일축했던 그는, 이날 공판에선 졸라제팜과 틸레타민을 따로 사용하더라도 그 위험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취지로 증언했다. 재판장이 3차 공판을 마무리했다.
변호인 쪽의 승산이 본격적으로 높아진 것은 4차 공판이었다. 9월10일에 열린 4차 공판에는 3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수의사를 비롯해 사건 발생 직후 김성재를 병원으로 후송한 소방관, 후송된 병원에서 사망을 확인한 응급실 의사, 병원 영안실에서 주검을 확인한 직원, 사건 당일 김성재를 검안한 의사 이○○도 법정에 섰다.
먼저 수의학자 정씨는 이날 검찰 조사 때와 같이 졸레틸50의 마약대용 가능성은 낮다고 일축하면서도, 치사량에 대해서는 졸레틸50 1병을 75kg의 성인남자에게 근육 혹은 정맥으로 투약하였을 경우, 3~5분 정도 시간이 경과되면 의식불명 상태가 되고 그 상태가 15분 정도 지속되지만, 그 양으로 사람이 사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75kg의 남자가 졸레틸50을 맞고 사망하려면 50병은 맞아야 한다는 정씨의 감정 증언은 검찰 쪽에 불리한 진술이었다.
항소심 변호인인 서정우는 1심에서 유죄의 강력한 근거가 된 사망추정시각을 허무는데 주력했다. 사진은 안성진 작가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김성재 화보. 유족 제공
이날 사체 검안의 이○○은 등 부위에만 시반이 있었기에 자신은 사망시각을 아침 7시5분으로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영안실 직원은 상반신에서 변색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증언들은 양측성 시반을 존재로 사망시각을 피고인이 호텔을 떠나기 전인 새벽 3시반 이전으로 본 검찰 쪽 논리과 배치되는 진술들이었다. 훗날 선고 공판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이○○과 영안실 직원의 증언을 채택하고 양측성 시반이 발견되었다는 황적준의 감정증언을 배척했다.
황적준과 함께 양측성 시반의 존재를 주장했던 부검의 김광훈은 1심 증언 시에 부검 당시 사체 앞가슴 등에서 미약한 시반이 있었으나 미약해서 부검감정서에는 기재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나, 반대심문하던 변호인이 그 부위를 표시하여 달라고 하자 정확하게 기억하여 표시할 정도가 아니라고 답변한 바 있었다. 이후 검찰 조사 및 항소심에선 주의하여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성 시반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김광훈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구급대원은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김성재가 확실히 절명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다만 상태가 위증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만 생각했다”며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면 변사사건 처리지침에 따라 119에서 처리하지 않고 경찰에 맡겼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최초로 사망을 확인한 응급실 의사도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고 했다. 이들의 증언도 아침 7시5분께를 사망추정시각으로 본 검안의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이를 통해 김성재가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1996년 11월5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돼 석방된 K가 이날 오후 5시께 서울 영등포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구속된 지 334일만이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응급의는 관례에 따라 김성재의 심전도 촬영 검사를 한 뒤 간호사에게 체온을 잴 것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기록엔 간호사 L이 김성재의 체온을 36도로 적은 것으로 돼 있다. 36도라면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과 거의 같은 온도였다. 이는 김성재가 죽은 지 얼마 안 됐거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응급의는 “확실히 죽었다고 판단될 경우엔 체온을 재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단서를 달아 논란을 일으켰다. 변호인은 “사체 사망시각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인 체온측정을 엉터리로 할 수 있냐”며 거칠게 따지고 들었다. 응급의와 함께 증인으로 채택된 간호사 L은 이날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일요신문, 1996년 9월22일자 참조)
재판장이 4차 공판을 마무리했다. 이날 공판을 거치면서 유죄 판단의 강력한 근거가 된 검찰의 사망추정시각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검찰은 다음 공판에서 이를 만회하지 못했다.
5차 공판은 9월17일에 열렸다. 사건 전 K를 좋아했다고 피고인이 주장한 대학 선배 심○○이 이날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심○○은 “본인은 K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한 적도 없고 당시 K가 김성재를 사귀고 있는지도 몰랐다”며 “95년 4월께 K와 통화한 적이 있는데, 제가 전화한 적은 없고 K가 먼저 전화를 걸었고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해 K가 거짓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5차 공판도 끝났다. 재판장은 결심공판을 기일을 알리며 공판을 마무리했다. 항소심은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1심에 비해 공판 차수는 절반에 불과했다.
결심공판은 10월22일, 같은 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결심공판에선 김성재를 최초 발견한 매니저 L이 검찰 쪽 마지막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L은 “K와 김성재가 만나는 동안 K가 김성재에게 피로회복제나 기타 주사를 놓는 것을 본 일이 없다”며 “류노아가 K에게 김성재가 죽었다고 전화했을 때, 처음엔 안 믿는 것 같아 ‘장난하지 말라’고 하였고 그 다음엔 놀라는 듯한 목소리였다고 전했다”고 했다. L은 이후 미국으로 이민갔다.
K의 항소심 무죄 선고를 보도한 <경향신문> 1996년 11월6일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모든 증인심문이 끝났다. 재판장이 변호인과 K에게 최후변론과 최후진술을 하라고 했다. 변호인 서정우는 1심에서 유죄의 강력한 근거가 된 사망추정시각(새벽 3시40분 이전)을 허무는데 주력했다. K는 1심과 같이 김성재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김성재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며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검사에게 구형하라고 했다. 검사 이○○은 공소사실에 더해 사망추정시각에 대한 방어논리를 펴면서 1심과 같이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 안성회는 결심공판을 마무리했다.
11월5일 화요일 오전, 또다른 운명이 날이 닥쳐왔다. 날은 흐렸고 한 두차례 비가 흩뿌렸다. 피고인 K에 대한 항고심 선고공판이 서울고법 형사5부 심리로 열렸다. 법정엔 기자 몇 명과 서부서 경찰이 보일 뿐, 1심과 같은 방청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재판부가 법정에 입장했다. 법정에 앉은 재판장 안성회는 “유죄를 인정하든 무죄를 선고하든 판결문 요지를 읽는데만도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뒤 장문의 판결문을 낭독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건강한 피해자가 갑자기 숨졌고 그의 몸에서 주사 자국이 발견됐으며 부검결과 피고인이 산 약물이 나온 점은 피고인도 대체로 인정하는 사실”이라며 “그러나 이런 심증만을 근거로 피고인을 살해범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검찰이 직접 사인으로 지목한 ‘약물 투여’를 두고 “피고인이 이를 숨진 김씨에게 투여했다 해도 졸레틸50 한 병은 건강한 사람을 마취시키기에 충분한 양이지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라고 볼 수는 없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어 “황산마그네슘은은 몸에 들어가면 황산염과 마그네슘으로 나눠 지는 물질이고 원래 사람 몸에 함유된 것이기에, 피고인이 투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범행 동기를 두고 “검찰은 피고인이 숨진 김씨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살해했다고 주장하나, 피고인의 정신감정 결과 정신이상이나 성격결함 따위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항소심 판결에 항의하며 활동 중단을 선언한 가수 이현도. <한겨레> 1996년 11월7일치. 한겨레자료
재판부는 또 “검찰이 사망시각을 추정하면서 그 증거로 내놓은 ‘양측성 시반’은 전문가들의 소견, 폴라로이드 사진의 자체 결함 따위를 따져볼 때 사망가능 시간대만 입증할 뿐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따라서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K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기징역에서 무죄로 판결이 뒤바뀐 것이다.
재판부는 스스로의 판단과 다른 법리에 대해서도 이례적으로 판결요지에 소개했다. K가 그 무렵 약물을 구입했고, 사건 발생 뒤 동물병원에 찾아가 이를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점 등을 법정에서 인정한 만큼 정황증거는 충분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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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검찰은 대법원에 즉각 상고할 방침을 밝혔다. 한편, 무죄가 선고됨에 따라 K는 이날 오후 5시께 서울 영등포구치소에서 석방됐다. 1995년 12월7일 구속된 후 334일만이었다. 이틀 후인 11월7일, ‘사자후’라는 노래로 인기상승 중이던 이현도는 재판 결과에 항의하며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8년 2월26일, 사건 발생 2년 3개월여 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었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이돈희 대법관)는 이날 검사의 상고를 기각,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고등법원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변은 없었다.
그렇게 김성재 변사사건은 영구미제가 됐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마지막회에선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려 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각주
1. 항소심 판결 이후인 1998년 11월,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상고심에서 이용훈 대법관은 ‘부분적으로는 유죄입증에 문제가 있는 증거들이라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유죄판단의 근거가 된다’며 항소심에서 무죄가 나온 이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례적 판결이었다. 반면, 김성재 사건의 경우 항소심 재판부는 K가 약물구입사실을 숨겨달라고 한 점, 부검에 반대한 점 등에 대해 범인으로 의심할 정황사실은 되지 못한다고 판시했다.
▶기획 의도
1995년 11월20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인기 댄스그룹 ‘듀스’의 전 멤버 김성재(23)가 숨진 채 발견됐다. 듀스 해체 이후 성공적인 솔로 데뷔 무대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1993년 4월 노래 <나를 돌아봐>로 데뷔한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적 바탕이 록이었다면, 김성재와 이현도로 이뤄진 듀스는 뉴잭스윙과 솔 등을 기반으로 흑인음악을 일관되게 추구한 뮤지션이었다. 듀스를 한국 힙합의 원조라고 하는 이유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26년이 됐다. 그 무심한 세월 동안, 김성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김성재 변사사건이 대한민국 연예계 최대 미제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김성재의 유족은 오늘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가장 격이던 큰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범인이 누구인지,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탓에 온전히 망자를 떠나보낼 수조차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당시 수사에 문제점은 없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김성재 변사사건은 경찰 초동수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표적 사례다. 사건을 미궁 속으로 빠뜨린 당시 검시제도의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 증언을 배척하거나 채택하는 등의 문제 또한 유효하다. 모두 김성재 변사사건으로 짚어봐야 할 공익적 가치다.
지난 1년6개월여 동안,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수사·공판 기록과 당시 신문·잡지 기사 등 3천 쪽 넘는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당시 수사기관·법원 관계자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유족과 지인들을 만났고 법의학자와 의사들의 조언도 구했다.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된 김성재 전 여자친구 쪽 변호인들도 수차례 접촉했다. 이제 26년 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죽음의 진상을 10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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